
곧게 나아가던 빛을 추억하며.
늦은 새벽,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기대감 같은 것은 하나도 없이 마을 모두가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든 지 오래였다. 서울은 이른 저녁부터 번화가를 오가는 사람들과 그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로 잠 못 이룰 날이었음에도, 같은 시간을 걷는 경산 한 외딴 마을의 밤은 그와는 달리 지나치게 소소하고 고요했다. 하지만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마을 한구석, 거리의 전등불도 오래전에 고장 나 아무도 가지 않는 그곳에, 수명이 다해가는 방 안의 등불 하나만이 마을의 밤을 밝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빛을 향해 가는 남자가 하나 있다. 어깨에 쌓여가는 눈을 제 체온으로 녹여버리며, 손에는 작은 가방과 등 하나를 들고 어둠에 둘러싸인 길을 걷는 이가 있다. 올해는 유독 크리스마스에 눈이 많이 오네. 홀로 중얼거리며 발로 뽀득이는 소리를 낸다. 한참 동안 쌓여 쉽게 녹지 않는 눈은 흰 바탕 위에 발자취만이 남을 뿐, 흙탕물에 섞여 흑으로 물들지 않는다. 하늘의 암흑에 물든 흰 길을 걷는다. 목적지가 확실하기에 걸을 수 있는 길이었다.
이윽고 다다른 작은 집에는 그 흔한 철문조차도, 마당도 없다. 남자는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서 문으로 향하는 계단을 걸어 올라가서는 문을 똑똑 두드렸다. 시린 손을 주머니에 찔러놓고는 안에서 누군가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대답이 없자, 이번에는 주먹을 쥐고 쾅쾅, 힘주어 두들겼다. 열린 문틈 사이로 고등학생 즈음 되어 보이는 소년이—얼굴만 앳된 어린아이였지, 몸집은 유난히 커서 제 원래 나이보다 두세 살 정도는 많아 보였다—겁에 질린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사내는 슬쩍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형이야, 상일아.
근태 형!
굳어있던 얼굴이 풀림과 동시에 문이 활짝 열린다. 근태가 그 안으로 발을 들일 틈도 없이, 상일이 제 양팔을 벌려 그를 껴안았다. 달려드는 상일을 보고 재빨리 무릎을 굽혀 가방을 내려놓은 그는 안겨 온 소년의 뒷머리를 한 손으로 쓰다듬어주었다. 행복한 웃음이 집 안을 가득 메운다. 미리 데워놓았는지, 문이 열리자마자 집안에서부터 오는 따뜻한 기운이 추위에 떨던 근태를 감싸주었다. 한동안 근태를 잡고 놓아주지 않던 상일이 떨어져서 그와 시선을 마주한다.
안 본 사이에 벌써 형만큼 컸네. 전에 봤을 때는 조그마했는데.
좀 있으면 형보다 훨씬 커질걸요.
처음 만났던 여름에만 해도 근태의 가슴팍 정도밖에 오지 않던 상일은 어느새 부쩍 커 근태와 맞먹는 키가 되어있었다. 시간 참 빠르네……. 웅얼거리며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선다. 그와 함께 상일이 살짝 동요하는 것을 근태는 알아채지 못했다. 내려놓았던 가방을 다시 집어 들고 상일을 본다.
손에 그건 뭐야.
혹시 모르잖아요.
어이쿠. 사람 잡겠네, 잡겠어. 사람 안 때려잡겠다고 약속했잖아. 잊어버렸어?
손에 꼭 쥐고 있던 야구방망이를 황급히 등 뒤로 숨긴 상일은 부끄러웠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해요, 하고 들릴락 말락 한목소리로 대답한 그에게 어깨동무한 근태는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대화를 이어갔다.
형 바쁜데 무리해서 온 것 아녜요? 지금 서울은 크리스마스 연휴라 바쁠 것 같은데.
뭐…. 형은 그렇게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 아직 아니라서. 휴가받아 온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제 정복에 달린 무궁화 모양 배지 하나를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한다. 근태가 벗은 겉옷과 정복 자켓을 받아든 상일은 달린 명찰을 잠시간 멍하니 바라보더니, 고개를 흔들어 깨어나서는 옷걸이에 얌전히 걸어놓는다.
현석이는?
여기 와서 저랑 같이 형 기다리다가 혜연이가 하도 보채는 바람에 집에 갔어요. …들어오세요, 형.
벗은 신발을 가지런히 놓아두고 상일을 따라 들어가 거실에 앉는다. 사실 상일이 사는 작은 단칸방에는 거실과 방의 구분이 없다. 둘 정도 앉아서 두런두런 얘기할 정도는 되지만, 현석에 그 어린아이까지 있었다면 정말 숨 쉴 틈조차 없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태가 집안을 둘러보는 그 짧은 사이에, 상일이 간단한 간식거리를 내어왔다. 늦은 시각이라 피곤할 법도 한데 눈에는 졸음이 전혀 서려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동안 잘 지냈고? 못 본 지 한 일 년 반 좀 넘었잖아.
대답은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다가, 근태가 상일의 어깨를 툭툭 치며 다시 묻자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듯이 대답했다.
네.
……상일아, 정말 무슨 일 있었어?
상일의 입가에 앉은 피딱지들이 근태의 눈에 들어온다. 상일은 멋쩍은 듯 웃으며 숨기려는 것을 날카롭게 간파하는 근태의 시선을 피했다. 근태가 뭐라 묻기도 전에 화제를 돌린다.
가지고 오신 가방들은 다 뭐예요?
아, 저것들.
근태는 종이가방으로 손을 뻗어 포장지에 쌓인 상자 두 개를 꺼내 들었다. 적색과 녹색이 섞인 포장지에 싸여있는 그것은 척 보기에도 많이 해본 사람의 손길이 닿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렇게 고급스러운 선물을 살 수 있는 것은 서울의 백화점뿐이리라, 어린 소년은 그리 짐작했고 그 짐작은 맞았다.
빈손으로 오는 것보다는 이런 소소한 거라도 들고 오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 크리스마스잖아.
요즘에 일이 잘 풀린다는 소문이 돌더니 진짜였나 보네. 밝은 근태의 표정 앞에서 상일은 내심 안심했다. 그 누가 제 영웅이 우는 모습이 보고 싶을까. 누구보다도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상일은 근태에게서 선물을 건네받자마자 귀 옆에서 두어 번 흔들어보았다. 부러 과장되게 궁금한 표정을 짓는 상일을 보며 근태는 상일이 내어온 보리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큰 건 현석이거고, 작은 게 네 거야, 상일아. 너무 세게 흔들진 말고.
열어봐도 돼요?
근태가 그럼, 하고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상일은 포장지를 뜯기 시작했다. 포장지를 거칠게 잡아당기던 손길이 순간의 망설임 뒤에 조심스럽게 바뀐다. 종이 한 조각도 고이 보관하겠다는 듯 테이프를 하나하나 뜯어서 선물 옆에 접어두고는, 상자를 열어본다. 완충재까지 열어서 안의 선물을 확인한 상일의 표정이 놀람으로 굳었다가, 이내 심각해진다.
잉크네요.
그래. 너 전에 부모님이 물려주신 만년필 있다고 했었지? 거기에 채워서 쓰면 돼. 곧 있으면 고등학교 들어가기도 하고, 경찰 되려면 열심히 공부해야 하니까. 형이 주는 선물이야.
감사합니다.
…안 써볼 거야?
그 한마디를 들은 상일의 표정이 완전히 무너져내리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는 흐느껴 울기 시작한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놀란 근태는 마시던 차를 내려놓고 상일에게로 다가간다. 오지 마세요, 한 마디를 내뱉은 상일은 근태가 있는 방향에서 뒤로 물러나려 한다. 근태가 더 이상 다가가지 않자 거리는 그대로 유지된다. 수명이 다 되어가는 전등불이 깜빡이더니, 그대로 꺼져버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한밤의 어둠 속에서 상일의 울음소리만이 고조되었다가 침묵 속에 점차 사라진다. 근태가 가져온 등의 불빛을 키고 떨어져 있던 거리를 좁히자, 상일은 급하게 양손으로 붉게 달아오른 눈가를 비볐다. 근태가 무어라 묻기도 전에 대답해야 할 것이라는 걸 직감하고는 계속해서 숨기던 것을 털어놓는다.
며칠 전에요, 전에 엮였던 그놈들이 또 찾아왔었는데……. 전부 다 싹 쓸어갔어요. 부모님이 남겨주셨던 것들이랑, 옷도, 가구도, 학교 가면 입으려고 했던 교복도, 몽땅 다.
그게 몇 년 전 일인데 아직도 그런 보복을 한단 말이야? 한동안 현석의 편지가 없어서 몰랐다. 방안을 더 자세히 둘러본다. 모두 현석의 집에서 본 것 같은 가구들과 현석이 옛날에 입고 있던 옷……. 희미한 등불에 의존해서 근태는 상일을 응시한다. 일렁이는 불이 상일의 얼굴을 비추자, 점차 그 얼굴이 근태에게 익숙한 누군가의 것이 되어간다. 거울. 과거를 비추는 거울. 근태는 과거의 자신을 그에게 투영한다. 부모님도, 그들이 주었던 모든 것도 무자비한 깡패집단의 손에 잃어버리고, 갈 곳을 몰라 울먹이던 그때를 회상한다.
정복 주머니에 손을 넣은 근태는 손때 묻은 펜 하나를 꺼내어 상일에게 내민다. 눈동자에 일렁이던 울음을 겨우 참아낸 상일이 고개를 들어 그것을 보자, 고여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오랫동안 사용해서 볼품없긴 하지만……. 선물로 줄게.
…정말요?
펜을 받아든 상일이 손에 쥐어진 것과 근태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본다.
그리고 말이야, 상일아. 혹시 형 따라서 서울로 올라올 생각은 없니?
현재의 유상일이, 그리고 과거의 박근태가 함께 입꼬리를 한껏 올려 웃는다. 자신이 제일 듣고 싶었던 말이었으며 또한 그가 제일 듣고 싶었던 말이라고 생각했기에, 근태는 자신의 물음에 긍정의 대답이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상일은, 그의 확신을 저버리지 않았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응. 내려오기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어. 현석이는 경찰대에 합격했다고 했으니까, 너 혼자 여기 남을 것 아냐.
그렇기야 하지만…….
싫어?
아뇨, 아뇨! 갈래요, 가게 해 주세요!
황당해하고 있던 상일이 펄쩍 뛰며 근태의 손을 덥석 잡는다. 울음기가 채 마르지도 않은 얼굴로 근태의 얼굴 바로 앞까지 가까이 접근하는 그 눈동자에는 지금껏 근태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간절함이 서려 있다. 상일의 뒤에 여전히 자리 잡고 있는 야구방망이를 다시 본 근태는, 작은 소망 하나를 가진다. 제 손을 감싸 쥐고 있는 그 투박한 어린아이의 손에 다시는 저런 둔기를 잡지 않게 하겠다는, 근태에게는 어쩌면 작은 것일 수 있으나 상일에게는 세상 무엇보다도 특별한 것이었다.
언제 서울로 돌아가실 거예요?
글쎄, 형도 여기서 이것저것 처리할 게 있어서. 네 집에 머물면서 이것저것 도와줄게, 상일아.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빛에 반사되어 밝게 빛나는 그 두 눈에는 열의와 존경심이 가득 차 있다. 근태는 다시 그에게서 과거의 자신을 본다. 문득 목이 마르다는 생각이 들어 식은 차를 단번에 들이켠 근태는, 상일을 향해 묻는다.
밤이 늦었는데…… 얼른 자야 하지 않을까, 상일아?
네, 형이 자라고 하면 잘게요!
상에서 벌떡 일어난 상일은 작은 다과상을 들고 부엌으로 향하더니, 금방 근태에게로 돌아와 낮 내내 접어두었던 이불을 꺼내어 펼친다. 근태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상일은 바닥의 온기를 머금은 이불에 제 몸을 묻고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형도 옆에서 같이 잘래요?
이렇게 입고?
저 잘 때까지만요. 불 꺼지면 무서운데.
거짓말같이 꺼졌던 등불이 팟, 하고 다시 들어온다. 상일도, 근태도 서로를 마주 보다 근태가 먼저 웃음을 터트려버린다. 방안이 파동으로 가득 찬다. 빛도 소리도, 모두 따뜻한 성질을 띠고 그들의 주변을 감싼다. 한참을 웃던 근태가 상일이 덮고 있는 이불을 한 손으로 토닥거린다.
그래, 잠들 때까지 여기 있어 줄게.
해 뜨기 전까지, 저 여기 두고 어디 안 갈 거죠?
대답을 잠시 망설이던 근태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빛은 눈앞의 흑색을 넘어 들어온다.
밝은 빛의 존재는 눈을 감은 이도 알아차릴 수 있으며, 그렇기에 어둠 속에 홀로 떨어진 것이 자신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금세 눈치챌 수 있다. 밤이 가고 해가 뜨면 빛이 밤새 쌓인 눈에 반사되어 아름다운 광경을 보여줄 것이다. 벽에 막히지 않는 빛은 흡수도, 반사도 되지 않는다. …광원이 사라지지만 않는다면 끝없이 뻗어 나갈 뿐이다.
박근태는 감았던 눈을 뜨고는 그에게 천천히 대답한다. 상일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고, 무슨 일이 있어도 곧게 나아가리라는, 자신을 향한 다짐이기도 했다.
당연하지, 상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