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숨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주의 품에 앉아서 감사기도 드릴 때
아기 잘도 잔다… 아기 잘도 잔다…….
검정색 스피커 망을 뚫고 흘러나오는 모든 소리가 낯설었다. 노랫말 있는 음악도 들려주는 곳이었구나…… 여기. 잠결에도 귓가를 괴롭히던 '엘리제를 위하여'를 떠올리다 고개를 저었다. 베토벤이고 뭐고 저에겐 그저 하루 일과를 대신 알려주던 시계음일 뿐이었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거룩한 탄생일에는 죄로 뒤덮힌 우물 안에서마저 축배를 들여야 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아랫층 침대에서 익숙한 기도가 시작되었다. 이런 시간이 되면, 믿을 수 없는 신을 향한 기도가 들려올 때면, 잊혀진 필름이 아득하게 반사되었다. 그리고……
팀장님!
반사된 필름 속에는 희미한 얼굴들만이.
"팀장님! 우산 챙기셨어요? 그칠 기미가 안 보는 게 내일은 화이트크리스마스가 되겠는데요."
자판 두드리는 불규칙한 소음 사이로 창문을 여는 소리가 불청객처럼 끼어들었다. 밪낮 없던 며칠이 고된 탓인지 서류더미에 묻힌 머리들이 엉망이었다. 캐롤이 울려퍼지는 이브의 밤에도 부쩍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던 이들은 그의 너스레를 환영했다.
"그러게. 벌써 크리스마스인가…… 바깥은 눈이 새와서 그렇다 치고, 우리 팀원들은 얼굴이 새하얘졌네. 많이 힘들지? 좀 쉴까?"
"예, 좋은 생각이십니다!"
"아이구, 대답은 또 총알같은 거 봐요~"
한참을 종이묶음을 분류하며 눈을 찌푸리던 오미정이 휴식에 동조하듯 기지개를 켰다. 개의치 않고 꿋꿋하게 할 일 하는 사람은 배준혁뿐이었다. 잠시 저녁식사를 대충 때우는 동안, 배준혁은 다음 날 성당을 가야 하니 최대한 일거리를 줄여놓는다고 했다. 양반이 이름값한다며 넘어갈 때 배준혁은 순수한 믿음에서 우러난 계획이 아닌 것에 조금 놀라기도, 또는 당연하다고도 생각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즐겁고 행복한 날, 남들처럼 진심으로 웃을 수 있게 하는 사람을 만나기로 했다. 바쁘게 움직이는 손과 평온한 표정이 대비되었다.
"이런 날에 일이라니……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우울하네요."
오미정이 정수기 앞에 서서 뜨거운 물을 받다 튄 물방울에 흠칫하며 물러섰다. 다가온 서재호가 그 손에서 종이컵을 받아들고 부족한 물을 채웠다. 아무렇게나 어질러진 테이블에서 커피가루가 든 통을 찾아내 뚜껑을 돌려 열었다. 작은 티스푼으로 네 개의 컵에 커피를 넣어 저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는 오미정에게 고개를 돌렸다.
"미정 형사도 퇴근하지 그랬어. 나랑 준혁이도 있는데."
"일손이 하나라도 더 있어야 빨리 끝나죠. 안 그래도 요즘 정보가 물밀듯이 들어오는데. 서 형사님도 괜히 무리하다 또 중요할 때 졸다 사고치지 말라고요."
"근데 왜 아직도 나만 서 형사래? 섭섭하게. ……으억! 뭐야, 또 왜!"
별안간 주먹쥔 손으로 어깨를 밀어낸 오미정이 제 몫의 커피 한 잔을 들고 벙찐 서재호를 유유히 지나쳐 갔다. 남은 세 잔을 손가락 사이로 끼워 든 서재호가 권현석과 배준혁에게 차례로 커피를 건네고 자리로 돌아와 털썩 앉았다.
"자, 힘들 내자고. 내일은 일찍 퇴근할 수 있도록 해 볼게."
선진화파 전담 잠입수사가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다만 좋은 결과를 낳을지, 절망만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다. 모든 것이 홍수에 휘말려 수면에 떠오르거나 가라앉기를 기다릴 뿐. 누구나 생각했지만 누구도 입 밖에 내지 못한 채 여러 밤을 지새웠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재호 형사님! 같이 하실래요?"
"네, 네? 저 말입니까? 하하, 이미 멋지게들 하셨는데 제가 할 게 뭐 있다고요, 참."
"그럼 이 별만 달아주세요. 재호 형사님만 기다렸다고요?"
발령 첫 주만에 정문에서 서재호 형사와 부딪혀 넘어졌던 다른 과 순경이었다. 그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갔지는 몰라도 그 날부터 자주 얼굴을 비추는 사람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찾아와 호들갑이더니 밤 샌 얼굴을 씻고 들어온 서재호를 불러세웠다. 정작 수사팀 사람들은 간밤에 골아떨어져 잠시 휴식실에 가 있었다. 텅 비었던 사무실 한켠에 트리가 놓였다. 그런데 왜 여기에서?
"웬 트리예요? 끊이지 않는 일거리에 지친 마음을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달래려는 노력?"
"으응? 아, 그게 아니고 OO팀 오순경이랑 팀원들이 와서 해주고 갔지 뭐야."
오미정은 순간 미간이 좁아지는 걸 참고 고개만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들어본 이름이었다. 서 내 여자들 사이에서 그 순경을 모를 순 없었다. 이곳에서도 남의 사랑 이야기는 유명무실한 소문이 되고 화젯거리가 되었다. 썩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해도 들리고 보였다. 그 투명한 소설 속 주인공이 서재호라는 점 빼고는 납득할만 한 사실이었다.
"……아주 별이라도 따다 줄 사람으로 보이나 봐."
"응? 뭐가?"
"뭐가요?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또 그런다, 또. 뒷머리를 긁적이던 서재호가 꾹 다문 입을 내밀며 툴툴대는데 ……메리 크리스마스! 권현석이 양 손에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아침 겸 점심이야. 밥을 선택하고, 퇴근에 집중한다!"
"미정 씨! 이제 오면 어째. 미정 씨 면회 왔대!"
"……네?"
"그 있잖아~ 맨날 가방 바리바리 싸 들고 오는 머리 구불거리는 남자."
아,
이 차가운 복도를 전진하는 길은 누군가에겐 반가움이 되기도 했고 그리움이 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자신에게는 어떨까. 이 걸음은 누구의 의지로 나아가는 걸까. 지난 밤 들었던 찬송이 혀끝에 맴돌았다. ……아기 잘도 잔다. 아기 잘도 잔다……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려온 자들에게 그들 주인의 탄생은 무엇으로 다가왔을까. 세상을 구원한 구세주의 현신. 마굿간 촛불 아래에서 터트린 첫 숨. 철문 앞에 선 오미정이 작은 한숨을 쉬었다. 간수가 문고리를 돌리자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의자, 유리막, 그 너머 보이는 미운 얼굴.
당신은 왜 오늘 나를 찾아왔나요.
"지치지도 않나 봐."
"하는 것도 없는데 뭘. 그보다, 잘 지냈나? 오미정 씨."
그다지. 아래층 침대에서 매일 밤 외우는 기도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 사실은 괴로워요. 그 사람이 어서 나가줬으면.
"……언제나처럼요. 누구 덕분에."
"흠, 일단 메리 크리스마스."
날 바라봐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보아하니 또 돌봐 줄 사람들이 차고 넘쳤던데…… 몸이 열 개라도 되나봐요? 이런 델 찾아오고."
"오미정씨야 말로 맨날 똑같은 말로 쫓아내지 말고 나한테 협조 좀 하시지? 이런다고 내가 눈치껏 사라져줄 거라 생각했다면 완전 잘못 봤다고. 섭섭해, 아주."
대꾸를 하던 말던 궁시렁대던 서재호가 혼잡한 가방 속을 뒤졌다. 마치 뭐 팔러 온 잡상인 같아 오미정은 살짝 웃을 뻔했다. 작은 틈새로 건네는 걸 보았다.
"……진짜네."
"어? 뭐가?"
별도 따다 줄 사람.
"몰라도 돼요. 뭐, 트리 꾸미다 왔어요? 즐거워 보이네."
"아아, 그게 설희가…… 아, 어어~ 맞아. 저녁에 파티하기로 했거든."
한 아이의 이름을 언급하다 아차, 하며 말을 돌렸다. 오미정은 그 모습을 보고 여전하다며 피식 웃어보였다. 어쩜 저렇게 한결같을까. 남의 눈치 보느라 자신을 돌아볼 새도 없었을 게 분명했다. 서재호는 얼마 간 혼자 제 근황을 읊어주고 손바닥을 보이며 인사를 했다.
"또, 올게. 새해 인사 하러."
"언제까지요?"
그런 걸 물은 것은 찰나의 아쉬움에 손을 떨었기 때문일까. 자신도 모르게 뱉어버린 질문을 주워담지 못한 오미정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서재호는 놀란 눈으로 바라보다 이내 잊혀진 필름 속의 장면처럼 아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스물 여덟의 경장 서재호가 된 것처럼.
"기다릴게."
"……."
"계속 인사 할 거야. 또 봐."
계속.
오미정은 손 안의 별을 움켜쥔 채, 뒤돌아 나서는 이를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으로 배웅했다.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