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리스마스 합작
정은창은 겁쟁이였다. 몸 사리지 않고 뛰어드는 선진화파의 행동대장 정은창, 그 모습을 아는 사람들은 고개를 저을 말이겠지만 그는 정작 소중한 것에 있어서는 한없이 겁이 많았다.
"정은창, 사랑해."
"...저도요."
그때문이다. 그의 다정한 말에 고작 저도요, 라는 말로 넘겨버리는 것은. 그의 연인은 그것으로 족하다는 듯 말갛게 웃어줬으나 정작 본인은 쓰린 속을 애써 감췄을 뿐이다.
그는 다정한 말에 익숙하지 않았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에도 각박했던 삶 속에서 그에게 온기어린 말 한 마디 해줄 이 하나 없었고, 여동생 은서 또한 그런 말을 해주기엔 너무 어렸기에 차라리 욕설섞인 거친 말이 더 익숙했다. 당연히 사랑한다는 말 같은 건 들은 적도, 해본 적도 없었다. 처음에는 저도요. 라는 말조차 하지 못해 애꿎은 입술만 깨물었지만, 그의 다정한 연인은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그러기를 여러 번, 수없이 마음 속으로 연습하고 되뇌이다 이제야 겨우 화답이라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론 부족했다. 항상 대답하기 전에 제대로 말해주고 싶어 머뭇거리다가도, 결국은 부족한 세 글자만을 내어놓는 것이 전부였다. 그의 연인은 한 번,
"정은창. 너무 조급해 하지마. 앞으로 시간은 많잖아? 천천히 하면 돼, 천천히. 나 어디 안 가."
하면서 웃어줬던 적이 있었다. 그 말대로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을 전해주지 못하는 건 꽤나 답답한 일이다. 정은창의 가슴 속에 전하지 못하는 마음이 응어리졌다.
"은창아."
화려한 불빛, 북적이는 인파. 캐롤이 큰 소리로 울려퍼지는 거리에서도 놓칠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와 땅을 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경감님."
추운 날임에도 모자 끝 하얀 털방울을 달랑거리며 웃는 그의 모습은 날씨마저 잊게 할 정도로 포근해 손을 뻗어 끌어안았다. 사람 많은 데선 손도 잘 잡지 않는 녀석이. 뭐가 됐든 품에 안겨드는 귀여운 연인은 사랑스러워서 꼭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많이 기다렸어? 몸이 차네."
"아뇨. 방금 왔어요."
그런 말을 순순히 믿어주기엔 경감으로서의 체면이 안 살지. 얼어있는 볼을 주머니에 넣어둔 손으로 녹여주며 웃었다. 제 거짓말이 금세 들통났다는 걸 알고 어색하게 웃으며 볼을 기대온다. 어디 들어가 있기라도 하지. 순진하고 곧이곧대로인 연인은 착실하게 약속장소에 일찍부터 나와 기다린다. 그런 모습이 사랑스러우면서도 안타까워, 더욱 애정을 부어주게 된다.
"갈까?"
귀여운 모습을 한참보다 한기에 제 손마저 얼어갈 정도가 되어서야 눈을 떼고 손을 맞잡았다. 그대로 제 코트 주머니에 맞잡은 손을 넣고는 걸음을 옮겼다.
정은창에게도 크리스마스, 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가끔 은서가 들고 오던 동화책 속의 그림. 눈 내린 밤에 반짝이는 트리, 울려퍼지는 캐롤. 온 가족이 둘러앉은 모습. 전부 나눠먹어도 남을 법한 음식과 단 케이크. 그 그림 속의 일부가 되는 일은 감히 바라지도 않았다. 길을 지나다 그런 모습을 보아도 부러운 감정 하나 생기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그런 것은 저와 무관한 것이라고 여겼기에, 그저 무딘 눈으로 걸음을 재촉했을 뿐이다. 이런 날에 벌어두어야 한다. 그래야 아픈 날에 하루라도 쉴 수 있었다. 정은창에게 크리스마스란 고작 그정도의 의미였다.
불꺼진 어두컴컴한 거실에서, 트리만은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보기 좋다. 예쁘다거나 이런 감상과는 거리가 먼 저조차도 이 광경은 마음에 남을 것 같다고 생각할 정도로 트리는 예뻤다. 지금껏 자신은 이런 것과는 연이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줄 알았다. 선진화파 조직원 정은창은 연말이 다가오면 시끌벅적한 틈을 타 일을 치기 위해 폐공장같은 곳에서 숨죽이거나, 인파 사이로 섞여서 거래를 해내곤 했다. 조직이 경찰의 방해로 숨죽이고 있는 지금, 생애 처음으로 크리스마스다운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다. 꽉 찼던 가슴을 가라앉히듯 숨을 길게 내쉬며 낮의 그 정신없고 활기차던 모습을 떠올렸다. 아마 제 인생에서 가장 사람다운 시간이었겠지. 한여름밤의 꿈처럼 지나가버린 시간을 상기하며 고요해진 공기를 들이마셨다. ...은서도, 좋아했겠지. 조용한 밤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사람. 저 때문에 스러져간, 내 동생. 불이 반짝이는 트리 앞에 주저앉아 불빛을 올려다 본다. ...이런 걸 받아야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은서인데. 왜 자신이 분에 넘치는 호사를 누리고 있는가. 행복하면 행복할 수록 그것은 제것이 아니란 생각만 강해졌다.
"정은창."
생각에 빠져 있던 그를 건져올린 건 익숙한 목소리였다. 정은창. 하고 변함없이 다정한 그 목소리를 듣고 있자면, 자신도 행복해도 될 것 같다는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아직 안 자셨어요?"
돌아보지 않고 대답하자 옆에 털썩 앉았다. 그제서야 불빛에서 눈을 떼고 시선을 옮겼다. ...산타? 아직도 그 옷을 왜 입고 있는지. 그의 연인은 눈동자에 어린 의아한 빛을 읽고 가볍게 웃어보였다.
"아직 우리 은창이 선물을 못 챙겨줘서, 다시 나왔지."
선물이라면 분명 받았다. 과분한 정도로 쌓이는 선물들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저는 그저 낮의 그 시간이면 충분했는데도 품에 곱게 포장한 상자들을 떠안겨 주는 두 사람은 마냥 아쉬워보였다. ...설마 아직도 남은 건 아니겠지. 이제 더는 진짜로 사양이다. 경계하는 눈을 알아챈 건지 다시 웃어보이고는 입을 열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착한 아이한테는 선물을 주는 거야."
...착한 아이. 돌이켜 보아도 저는 착하게 살아온 적이 없다. 살기 위해 발버둥치고 남을 짓밟고 살아남았다. 자신은... 복잡해진 그의 마음을 전부 아는 것처럼, 따뜻한 손이 조심스럽게 손을 감싸 쥐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손이 손끝부터 천천히 온기에 물들어간다.
"정은창. 지금까지 정말 잘 해줬어."
거칠고 상처난 손을 가만가만 쓸어주며 웃어주는 그는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정말 이 사람이 내 연인인지, 지금이 헛된 꿈은 아닌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만약 꿈이라면 자신은 깨어났을 때 한없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이 온기를 잃은 채로는 얼어죽지 않을 자신이 없다. 그의 손이 제 볼을 쓸자 눈물이 묻어나왔다. 언제부터 울고 있었는지 몰랐다.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눈물만 쏟아내는 그는, 우는 방법도 채 몰랐다. 눈물이 흐를 때마다 말없이 볼을 쓸어주던 그의 연인은, 좀처럼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아예 끌어안고 등을 느리게 쓸어줬다.
"지금, 내가 너를 안을 수 있는 건 네가 이 순간까지 버텨줬기 때문이야. 고맙고, 사랑해. 정은창."
언제나와 같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해오는 그의 말에 깨달았다. 자신은, 복수를 위해서 달려온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순간만을 위해 살아왔다고. 은서를 잃은 자신이 원하던 건 복수를 위한 파멸이 아닌 바로 가족이었다고.
"...해요. ...사랑, 해요. ...사랑해요, 경감님."
울먹임에 말이 흐려져 몇 번이고 다시 내뱉었다. 그간 할 수 없던 것이 무색할 만큼, 마음 속에서 터져나오는 말을 막을 수 없었다. 사랑한다는 말. 그 짧은 말에 그의 감정이, 세월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었다.
"...사랑해, 정은창."
"사랑해요, 경감님."
눈물젖은 얼굴로 응어리가 풀린 듯 웃는 그를 끌어안고 조심스레 입을 맞췄다. 트리의 불빛이 비치는 서로의 눈동자를 마주 보며, 가만히 입술만 닿은 채로 한참을 그렇게, 그대로 있었다.